빠른 74년생 큰형을 시작으로,
75년 7월에 둘째 누나가 태어났고,
76년 11월 끝자락에는 쌍둥이 막내로 내가 태어났다.
아버님은 참 호전적이셨다.
그렇게 아이 넷이 줄줄이 태어나다 보니,
내가 아주 어릴 때는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계시면서 함께 키워주셨다.
어릴 때 사진을 보면 우리 쌍둥이 곁에서 환하게 웃고 계시는 외할머니의 모습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아버님은 늘 외할머니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손주, 손녀가 많으셨지만 우리 쌍둥이를 유독 많이 아껴주셨다.
형은 무던하다고 ‘무던이’, 나는 촐랑거린다고 ‘촐랑이’라 부르셨다.
할머니 품은 늘 넉넉하고 따뜻했다.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이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밤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정류소에는 외할머니가 서 계셨다.
아마 시험을 앞둔 손주를 응원해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얼마나 오래 기다리셨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보자 환하게 웃으시며 손을 꼭 잡아주셨다.
글과 숫자를 제대로 깨치지 못하셨던 할머니.
내가 타고 다니던 버스는 83번이었다.
어느 버스를 타는 줄 알고 기다리고 계셨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8자는 눈사람처럼,
3자는 그 눈사람이 반쯤 허물어진 모양처럼 기억하고 계셨다.
“촐랑이가 타는 버스지.” 하셨다.
그리곤 속고쟁이에서 만 원짜리를 주섬주섬 꺼내셨다.
“고3이고 공부하기 힘들지.”
그러면서 내 손에 꼭 쥐여주셨다.
할머니는 그 뒤로 몇 년을 더 살지 못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잠시 우리 집에 계셨다.
가스레인지를 반들반들하게 닦아놓으시고,
계단을 오르면서도 곳곳에 쌓인 먼지를 걸레로 훔쳐내곤 하셨다.
동물의 왕국도 참 좋아하셨다.
할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아 비디오가게에서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빌려다 보여드린 기억도 난다.
임종을 앞두고 부모님은 병상에 누워 계신 할머니께 우리를 인사시켰다.
할머니는 무언가 말씀하고 싶어 하셨지만,
기력이 없으셔서인지 말이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는 않았다.
힘없는 손으로 내 손등을 쓸어주시며
“우리 촐랑이 왔냐”는 듯 바라보셨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글 완희 · 편집 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