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간 친구를 추억하며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친구였다.
친구의 부모님은 환경미화원이셨고, 나이 터울이 꽤 나는 누나가 셋 있었다.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그랬던 것 같다. 부모님의 직업을 가지고 아이를 놀리거나 무시하는 일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벌어지곤 했다.
친구도 “너희 부모님 쓰레기 청소하시잖아” 같은 말을 듣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가 놀림거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린 친구에게는 꽤 큰 상처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친구는 주위에 많은 사람을 두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와는 죽이 맞았다.
정작 내게 그 친구의 집은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주택이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발장 위에 수족관이 하나 있었다. 이끼가 잔뜩 낀 수족관 안에는 사람 손바닥만 한 금붕어가 살았다.
얼마나 잘 먹였는지 배는 빵빵했고, 죽었나 살았나 싶을 정도로 움직임도 느렸다. 친구 집에 갈 때마다 오며 가며 녀석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도 일이었다.
집에는 지하실도 있었다. 입구부터 온갖 물건들이 즐비했는데, 지금도 낚시릴이 한 박스째 있었던 건 기억난다.
친구 방으로 들어가던 동선도 기억난다.
친구 방에 가려면 누나들이 있던 방을 지나야 했다.
내가 들어가면 누나들은 늘 쌍둥이 형인지 나인지부터 물었다.
정작 형은 친구 집에 손에 꼽을 정도로밖에 오지 않았는데, 갈 때마다 꼭 한 번씩 물으셨다.
내가 인사를 하면 친구가 안에 있다며 반겨주셨고, 나는 그 방을 지나 안쪽에 있는 친구 방으로 들어갔다.
국민학생 때는 집에 비디오가 있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친구 집에는 비디오가 있었고, 안방에서 영화를 봤던 기억도 많다.
친구 아버님은 이른 아침부터 일을 하고 돌아오시면 쉬셔야 했을 텐데, 우리가 비디오를 보고 있어도 굳이 내보내지 않으셨다.
방 한쪽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는 이불을 덮은 채 조용히 쉬시곤 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마음이 조금은 읽히는 것 같다.
친구는 국민학교 때만 해도 통통한 편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젖살이 빠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는 살이 많이 빠져 이목구비가 유난히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 무렵 내가 알던 한 여동생이 친구를 보더니 원빈을 닮았다며 아주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꾸미는 데 별 관심도 없었고 스타일도 영 아니어서 그렇지, 가만히 보면 인물이 썩 좋은 녀석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지금까지 그 친구를 인물 좋은 친구로 기억하신다.
고등학교 때의 친구는 정말 조용했다.
학교에서는 눈에 띄는 편도 아니었고 존재감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 나와 있을 때는 조금 달랐다.
B612의 〈나만의 그대 모습〉, 블랙홀의 〈깊은 밤의 서정곡〉,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 같은 노래를 좋아했다.
양껏 폼을 잡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르곤 했는데 제법 잘 어울렸다.
학교를 휴학하고는
“남자는 무조건 해병대지.”
하며 사서 고생하러 해병대를 갔다.
군대 가기 전의 소위 남자들의 추억(?)은 굳이 여기에 남기지 않으련다.
서로 술을 즐기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맥주 한두 병만 마셔도 세상 술은 지 혼자 다 마신 사람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던 녀석이었다.
친구와의 기억 중 유난히 남아 있는 장면은 곽경택 감독의 《친구》가 비디오로 나왔을 때다.
샤론 스톤의 《원초적 본능》 이후로 기억나는, 꽤 오랜만의 초대였다.
뜬금없이 녀석이 나를 불러서는 말했다.
“이 영화는 친구랑 꼭 봐야 된다.”
굳이 의리를 입에 올리며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응당 생각하는, 그런 사이였던 것 같다.
친구는 검도도 꽤 오래 했다.
특별히 재능이 있어 보이는 녀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슨 일이든 가볍게 대충 하는 친구도 아니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진득하게 붙들고 가는 면이 있었다.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딱 한 번,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은 있다.
“니는 참 멋진 놈이다. 뭐든 진득하게 하는 모습은 내가 배울 게 많다.”
그건 진심이었다.
친구가 취업을 준비하는 시간은 꽤 더디게 흘러갔던 것 같다.
똑똑한 친구는 아니었다. 남들보다 빨리 배우거나 앞서 나가는 녀석도 아니었다.
IT 쪽으로 일을 해보겠다며 프로그래밍을 공부했고, C언어와 파이썬도 배우고 자격증도 하나씩 준비했다.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원하던 자격증은 거의 다 취득했고, 막 취업을 알아보던 시기로 기억한다.
그 무렵 친구에게 암이 생겼다.
얼굴 쪽이었다.
눈과 코 사이 뒤쪽으로 암 병변이 생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확한 병명이나 치료 과정은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위치 때문이었는지 치료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친구는 거의 1년 정도 병원에 있었다.
가끔 안부를 물었고 실제 병문안을 간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것 같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여자도 제대로 사귀어본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병문안을 가면 별소리를 다 했다.
자기가 인물이 좋아서 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둥, 누구는 자기한테 완전히 뻑이 갔다는 둥.
힘든 상황을 애써 감추려고 밝은 척하는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으며 그냥 웃었다.
그러다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보다 경과가 좋았고 결국 퇴원도 했다.
퇴원한 친구가 운동을 하고 싶다며 집에 있던 벤치프레스와 역기 같은 것을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그냥 줘버렸다.
그랬더니 부모님께 한소리를 들었다.
왜 남을 주느냐고.
그래도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친구가 다시 운동을 하며 건강을 챙기려는 모습이 좋았고, 그냥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각자 사는 모습이 달라져도 가끔은 만나고, 그렇게 나이 들어갈 줄 알았다.
그냥 내 삶의 배경 어딘가에는 늘 있을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나는 일을 시작했고 바쁘게 살았다.
자연스럽게 연락도 뜸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전화기 너머의 친구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만나자고 해도 별로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고, 나를 피하는 느낌도 있었다.
걱정도 되고 보고 싶기도 해서 무턱대고 찾아갔다.
어머님은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반겨주셨고 음료도 내어주셨다.
그때 본 친구는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살도 많이 빠져 있었고 얼굴도 많이 상해 있었다.
한쪽 눈은 초점이 흐려 보였고, 눈두덩 아래쪽으로는 병변이 그대로 드러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를 보더니 친구가 말했다.
“뭐 하로 왔노? 조용히 갈랬드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낮이었는데 방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사각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이것저것 검색하고 있었다.
나도 그 곁에 앉았다.
그러다 친구가 여러 종류의 후레쉬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 후레쉬는 어떻고, 저 후레쉬는 어떻고.
성능이 어떻고 빛이 얼마나 멀리 가는지 하나씩 이야기했다.
그러다 어느 후레쉬를 보여주며 빛이 달까지 갈 정도로 성능이 좋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리곤 어떻게 친구 집을 나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괜찮아질 거다”, “건강 잘 챙기자” 같은 말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아마 “또 올게” 정도로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집을 나서면서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친구의 사망 소식은 몇 달이 지난 뒤에야 들었다.
친구와 같은 동네에 살던 다른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집 앞을 지나는데 가족들이 집 안에서 그릇을 깨며 정리하는 모습을 봤고, 그제야 친구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친구가 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동네에서 친구 어머니를 우연히 마주쳤다.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 먹먹했다.
울음이 올라오는 것을 삼키느라 힘들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한 번씩 그 친구가 생각난다.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거창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냥 간간이 만나 서로의 일상을 묻고, 시답잖은 농담이나 주고받았을 것이다.
겉으로는 별말 없어도 속으로는 서로를 생각하고, 필요할 때 한 번씩 챙기는 사이로 그렇게 나이 들어갔을 것 같다.
같이 늙어가면서 그런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글 완희 · 편집 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