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공평하다고 했던가.
이 꼭지에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 같은 면이 없잖아 있지만, 애정결핍이 어떤 쪽으로 채워졌는지를 한번 적어보려 한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느끼는 나는 유독 사람과 관계에 정성을 많이 쓰는 편이다.
사람 이름을 기억하고, 예전에 함께했던 시절을 오래 붙잡고, 남들은 그냥 지나칠 만한 관계에도 혼자 의미를 부여한다.
별것 아닌 대화도 기억하고, 사소한 디테일도 챙긴다.
그러다 보니 마당발이라는 소리도 종종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사람을 좋아해서 그렇게 한 것인지, 사랑받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둘 다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후자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관계가 생기면 허투루 하지 않았고, 누군가 나를 찾으면 고마웠다.
보자는 말을 들으면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았고, 인연이 닿으면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았다.
추억이라고 할 만한 관계가 아닐지라도 나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의 결을 읽는 쪽으로도 발달한 것 같다.
예전에는 영업과 공사를 함께했다.
지금은 공사보다 영업이 내 일이 되었다.
결국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통화를 하다 보면 대충 보인다.
이 사람이 어떤 성향인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어느 대목에서 마음이 움직일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어떤 멘트를 날려야 할지, 어디까지 밀어야 하고 어디서 멈춰야 할지.
소위 니즈를 빨리 읽고, 맞춰가는 방향을 잡는 편이다.
그런데 나는 이게 단순히 영업 감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투와 표정, 반응을 오래 살피며 살아온 습관이 그쪽으로도 이어진 것 같다.
관계가 틀어지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상대의 속내를 먼저 읽어내려 했던 버릇이 어느 순간 먹고사는 일에도 도움이 됐다.
그러니 어쩌면 신은 공평한지도 모르겠다.
한쪽이 비어 있으니, 다른 한쪽은 유난히 발달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람을 잘 챙기고, 잘 공감하고, 말을 아끼고, 따뜻하게 대하는 것이 꼭 성숙해서만은 아닐 수도 있다.
버릇일 수도 있고, 오래된 습관일 수도 있다.
조언을 해야 할 때도 하고 싶은 말 열 번쯤 삼켰다가 한마디를 꺼낸다.
괜히 상처 주고 싶지 않고,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다.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말을 잘 들어주고, 잘 공감해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끊어지는 쪽보다 이어지는 쪽을 늘 택해왔던 것 같다.
일이 아닌 관계도 비슷했다.
친구들이 고맙고,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고마워서 가능한 보자는 말에는 거절을 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기억하고, 붙잡고, 이어가는 데 꽤 많은 에너지를 썼다.
그게 나를 지탱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 50을 앞두고 조금 달라지는 게 있다.
전 정부의 수장이 한국 나이를 국제표준(?) 나이로 바꿔준 덕분에 아직은 40대라고 우길 수 있지만, 11월 생일이 지나면 나도 50이다.
반평생을 산 셈이다.
50이 가까워지니 예전처럼 관계의 폭을 넓히는 일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는 않다.
예전에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밖으로 더 뻗어나갔다.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이 연결되고, 더 많이 의미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관계의 피로감을 느끼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방향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 어쩌면 그냥 그럴 나이에 접어든 건지도 모르겠다.
관계의 폭을 넓히는 쪽이 아니라, 이미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는 쪽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결핍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오래된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는 쪽으로.
결핍이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에 대한 정성과 애씀도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예전처럼 그 에너지를 밖으로만 쓰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안으로 돌리고 싶다.
가족에게, 내 사람들에게, 이미 곁에 있는 관계들에게.
생각해보면 이것도 결국 같은 일인지 모르겠다.
결핍을 채우는 일.
다만 예전에는 사람을 넓게 붙잡으며 채우려 했다면, 이제는 내가 가진 사람들을 더 깊게 붙잡는 쪽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결핍을 채우는 방향을 바꾼 것이다.
글 완희 · 편집 GPT